리처드 캉티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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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리처드 캉티용은 1680년에서 1690년 사이에 태어난 것으로 추정되는 스페인계 아일랜드인 상인의 아들로, 경제학자이자 은행가이다. 그는 존 로의 미시시피 계획에 관여하여 부를 축적했으나, 이후 발생한 버블 붕괴와 관련된 소송으로 인해 프랑스를 떠나 암스테르담으로 이주했다. 캉티용은 《상업 일반에 관한 시론》을 저술하여 경제학의 여러 분야에서 선구적인 통찰을 제시했으며, 기업가 정신, 화폐 이론, 공간 경제학, 인구 이론 등 다양한 분야에서 중요한 이론을 제시했다. 그는 중농주의의 선구자로 평가받으며, 윌리엄 스탠리 제번스에 의해 "경제학의 요람"으로 재평가되면서 현대 경제학에 큰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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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처드 캉티용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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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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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리처드 캉티용 |
출생 | 1680년대 |
출생지 | 트랄리, 케리 주, 아일랜드 |
사망 | 1734년 (약 54세) |
사망 장소 | 런던, 잉글랜드, 그레이트브리튼 |
국적 | 아일랜드 / 프랑스 |
학문 분야 | |
관심 분야 | 정치경제학 |
학파 | 중농주의 |
영향 | 장 부아사르 키케로 찰스 데버넌트 존 로 리비우스 존 로크 윌리엄 페티 플리니우스 장로 에드먼드 핼리 아이작 뉴턴 플리니우스 세바스티앙 르 프레스트르 드 보방 |
영향을 받은 인물 | 미라보 장바티스트 세이 애덤 스미스 안 튀르고 프랑수아 케네 |
주요 아이디어 | 기업가로서의 위험 감수자 통화 이론 공간 경제학 인구 증가 이론 인과 관계 방법론 |
서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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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생애
리처드 캉티용은 1680년에서 1690년 사이에 아일랜드 케리주 발리헤이그에서 스페인계 아일랜드인 상인의 아들로 태어났다.[2][3][1][4]
18세기 초, 프랑스로 이주하여 프랑스 시민권을 획득했다.[5] 1711년, 영국 지급총장 제임스 브리지스의 고용인이 되어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동안 영국 전쟁 포로들에게 지급할 자금을 조직하는 일을 맡았다.[6] 1714년까지 스페인에 머물면서 여러 사업 및 정치적 관계를 구축한 후 파리로 돌아와, 가족 은행의 파리 지점 주임 통신원이던 사촌 밑에서 은행업에 종사했다.[7][8] 2년 후, 제임스 브리지스의 재정적 지원으로 은행을 인수하여 소유권을 획득했다.[9] 가족과[10] 제임스 브리지스를 통해 얻은 재정적, 정치적 연줄 덕분에, 파리와 런던 간의 자금 이체를 전문으로 하는 꽤 성공적인 은행가로 성장했다.
이 시기에 영국의 중상주의 경제학자 존 로와 미시시피 회사를 통해 관계를 맺게 되었다.[12] 존 로는 확장적 통화 정책이 사용되지 않은 토지와 노동력의 고용을 유도하여 생산성을 높일 것이라고 주장했다.[14] 1716년, 프랑스 정부는 그에게 '방크 제네랄'을 설립할 수 있는 권한과 미시시피 회사라는 이름으로 북미 프랑스 영토를 개발할 수 있는 사실상의 독점권을 부여했다.[15]
캉티용은 미시시피 회사 주식을 초기에 매입하고 나중에 더 높은 가격에 판매하는 투기를 통해 막대한 재산을 모았는데, 그는 로의 "계획이 부실하고 실패할 운명"이라고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했다.[17] 캉티용의 재정적 성공과 영향력 증가는 존 로와의 관계에 마찰을 일으켰고,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로는 캉티용이 24시간 이내에 프랑스를 떠나지 않으면 투옥하겠다고 위협했다.[18] 캉티용은 "나는 떠나지 않을 것이오. 하지만 당신의 시스템을 성공시키겠소."라고 대답했다.[18]
1719년, 파리를 떠나 암스테르담으로 갔고, 1720년 초에 잠시 돌아왔다. 파리에서 대출을 해주고 런던과 암스테르담에서 채무를 회수했다.[20] 미시시피 버블 붕괴로 캉티용은 높은 이율이 붙은 채권을 회수할 수 있었다.[21] 그의 채무자 대부분은 버블 붕괴로 재정적 피해를 입었고 캉티용을 비난했는데, 캉티용은 사망할 때까지 채무자들이 제기한 수많은 소송, 살인 음모, 형사 고발 등에 연루되었다.[22]
1717년에 독립하여 존 로의 신임을 얻었으나, 로가 추진한 미시시피 계획의 실현 가능성에 대해서는 회의적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캉티용은 그에 따른 버블로 막대한 이익을 얻었다. 그러나 이후 고객과의 소송에 휘말려 프랑스를 떠나 암스테르담을 거쳐 런던으로 이주했다. 런던에서 그는 방화로 인해 사망했다.
2. 1. 초기 생애
리처드 캉티용은 1680년에서 1690년 사이에 아일랜드 케리주에서 스페인계 아일랜드인 상인의 아들로 태어난 것으로 추정된다.[2][3][1] 그의 가문은 발리헤이그의 토지 소유주였다.[4]2. 2. 프랑스 이주와 은행업
18세기 초, 캉티용은 프랑스로 이주하여 프랑스 시민권을 획득했다.[5] 1711년, 캉티용은 영국 지급총장 제임스 브리지스의 고용인이 되어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동안 영국 전쟁 포로들에게 지급할 자금을 조직하는 일을 맡았다.[6] 1714년까지 스페인에 머물면서 여러 사업 및 정치적 관계를 구축한 후 파리로 돌아왔다.[7] 이후 은행업에 종사하게 되었는데, 당시 가족 은행의 파리 지점 주임 통신원이던 사촌 밑에서 일했다.[8] 2년 후, 제임스 브리지스의 재정적 지원으로 캉티용은 사촌에게서 은행을 인수하여 소유권을 획득했다.[9] 가족과[10] 제임스 브리지스를 통해 얻은 재정적, 정치적 연줄 덕분에, 캉티용은 파리와 런던 간의 자금 이체를 전문으로 하는 꽤 성공적인 은행가로 성장했다.[11]2. 3. 존 로와의 관계와 미시시피 회사
이 시기에 캉티용은 영국의 중상주의 경제학자 존 로와 미시시피 회사를 통해 관계를 맺게 되었다.[12] 존 로는 1650년 윌리엄 포터가 제안한 화폐 이론을 바탕으로,[13] 확장적 통화 정책이 사용되지 않은 토지와 노동력의 고용을 유도하여 생산성을 높일 것이라고 주장했다.[14] 1716년, 프랑스 정부는 그에게 '방크 제네랄'을 설립할 수 있는 권한과 미시시피 회사라는 이름으로 북미 프랑스 영토를 개발할 수 있는 사실상의 독점권을 부여했다. 그 대가로 로는 프랑스 정부에 낮은 금리로 부채를 조달할 것을 약속했다.[15] 로는 미시시피 회사 주식을 판매하여 투기 거품을 일으켰고, 투자자들에게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방크 제네랄'의 은행권 발행에 대한 사실상의 독점권을 사용했다.[16]리처드 캉티용은 미시시피 회사 주식을 초기에 매입하고 나중에 더 높은 가격에 판매하는 투기를 통해 막대한 재산을 모았는데, 그는 로의 "계획이 부실하고 실패할 운명"이라고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했다.[17] 캉티용의 재정적 성공과 영향력 증가는 존 로와의 관계에 마찰을 일으켰고,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로는 캉티용이 24시간 이내에 프랑스를 떠나지 않으면 투옥하겠다고 위협했다.[18] 캉티용은 "나는 떠나지 않을 것이오. 하지만 당신의 시스템을 성공시키겠소."라고 대답했다.[18] 이를 위해 1718년 로, 캉티용, 그리고 부유한 투기꾼 조셉 게이지는 북미 부동산 투기를 더욱 지원하는 데 중점을 둔 개인 회사를 설립했다.[19]
2. 4. 미시시피 버블 붕괴와 이후
1719년, 캉티용은 파리를 떠나 암스테르담으로 갔고, 1720년 초에 잠시 돌아왔다. 캉티용은 파리에서 대출을 해주고 런던과 암스테르담에서 채무를 회수했다.[20] 미시시피 버블 붕괴로 캉티용은 높은 이율이 붙은 채권을 회수할 수 있었다.[21] 그의 채무자 대부분은 버블 붕괴로 재정적 피해를 입었고 캉티용을 비난했는데, 캉티용은 사망할 때까지 채무자들이 제기한 수많은 소송, 살인 음모, 형사 고발 등에 연루되었다.[22]2. 5. 런던에서의 죽음
캉티용은 1717년에 독립하여 존 로의 신임을 얻었으나, 로가 추진한 미시시피 계획의 실현 가능성에 대해서는 회의적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캉티용은 그에 따른 버블로 막대한 이익을 얻었다. 그러나 이후 고객과의 소송에 휘말려 프랑스를 떠나 암스테르담으로 향했고, 이후 런던으로 이주했다. 런던에서 그는 방화로 인해 사망했다.3. 《상업 일반에 관한 시론》
리처드 캉티용의 저작 중 현재까지 남아있는 것은 《상업 일반에 관한 시론(Essai Sur La Nature Du Commerce En Général)》(약칭 《시론》)뿐이다.[1][23] 1730년에 쓰여졌고,[24] 1755년에 프랑스어로 출판되었으며,[25] 1932년 헨리 힉스(Henry Higgs)에 의해 영어로 번역되었다.[26] 《시론》은 경제학 초창기에 큰 영향을 미쳤지만, 19세기 동안 잊혀졌다.[27] 19세기 후반, 윌리엄 스탠리 제본스(William Stanley Jevons)가 《시론》을 "정치경제학의 요람"이라 칭하며 재발견한 이후,[28] 점차 주목받기 시작했다. 《시론》은 경제 이론에 관한 최초의 완전한 논문으로 여겨지며,[29] 캉티용은 "기업 경제학의 아버지"라고 불린다.[1][30]
캉티용은 윌리엄 페티(William Petty)의 1662년 논문 《조세론》(Treatise on Taxes)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31][32] 다만, 앤서니 브루어는 페티의 영향력이 과대평가되었다고 주장한다.[33] 캉티용에게 영향을 준 다른 인물로는 존 로크(John Locke),[34] 키케로, 리비우스, 대 플리니우스, 소 플리니우스, 찰스 데이븐트, 에드먼드 헬리, 아이작 뉴턴, 세바스티앙 르 프레스트르 드 보방, 장 부아르(Jean Boisard) 등이 있다.[35] 특히 존 로의 투기적 거품에 대한 캉티용의 경험은 화폐 공급 증가, 가격, 생산 간의 관계에 대한 통찰력을 제공했다.[36]
3. 1. 방법론
캉티용의 『에세이』는 캉티용을 그의 중상주의 선배들과 구별짓는 독특한 인과적 방법론을 사용하여 작성되었다.[1][37] 『에세이』는 "자연적"이라는 단어로 가득 차 있는데, 캉티용의 논문에서 이 단어는 경제적 행동과 그 근본적인(즉, 원인이 되는) 현상 사이의 인과 관계를 의미한다.[38] 경제학자 머레이 로스바드는 캉티용을 통제 불가능한 변수를 고정할 수 있는 단순한 모델로 경제 현상을 분리한 최초의 이론가 중 한 명으로 평가한다.[39] 캉티용은 독립 변수를 무시하기 위해 『에세이』 전체에서 다른 조건 불변의 개념을 자주 사용했다.[40] 게다가 그는 단순한 관찰로부터 복잡한 현상을 연역하는 방식으로 카를 멩거의 방법론적 개별주의와 유사한 방법론을 사용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41][42]인과 관계 방법론은 경제 과학에 비교적 가치 중립적인 접근 방식을 이끌었으며, 캉티용은 특정 경제 행동이나 현상의 장점에는 관심이 없고 관계의 설명에 집중했다.[43] 이는 캉티용이 경제 과학을 이전의 중상주의 작가들보다 정치 및 윤리로부터 더 분리하게 만들었다.[39] 이러한 점은 캉티용이 정부가 조작한 무역 수지 흑자와 상품 화폐 축적을 긍정적인 경제적 자극으로 자주 언급했기 때문에, 캉티용을 과연 중상주의자로 간주할 수 있는지 아니면 최초의 반(反)중상주의자 중 한 명으로 간주할 수 있는지에 대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44][45] 캉티용이 특정 중상주의 정책을 지지했다고 생각되는 경우, 그는 실제로 중상주의 정책의 가능한 한계를 명시적으로 언급함으로써 더 중립적인 분석을 제공했다는 주장도 있다.[46]
3. 2. 화폐 이론
캉티용은 존 로크의 화폐 수량설을 발전시켜 상대적 인플레이션과 화폐 유통 속도의 중요성을 강조했다.[55] 그는 인플레이션이 점진적으로 발생하며, 새로운 화폐 공급이 경제 전체에 불균등하게 영향을 미치는 "캉티용 효과"를 제시했다.[56][58][59] 즉, 새로운 화폐의 최초 수령자가 나중 수령자의 희생을 통해 더 높은 생활 수준을 누린다는 것이다.[57]캉티용은 화폐 유통 속도(특정 시간 내에 이루어진 교환의 양)의 변화가 가격에 영향을 미친다고 보았다.[60] 그는 화폐 공급이 주화로만 구성되어 있다고 믿었지만, 화폐 대체물(은행권)의 증가는 예금된 주화의 유통 속도를 효과적으로 증가시켜 가격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인정했다.[61] 그는 화폐와 화폐 대체물을 구별했으며, 신용 화폐의 양은 상환 가능성에 대한 사람들의 신뢰에 의해 제한된다고 보았다.[62] 그는 신용 화폐가 주화 축적이 화폐 유통 속도에 미치는 하방 압력을 완화하는 유용한 도구라고 생각했다.[63]
캉티용은 중상주의자들과 달리 통화 개입이 영구적으로 유리한 무역 수지를 초래할 수 있다는 믿음에 반대하며, 미래의 국제 통화 균형 이론을 예고하는 주화 흐름 메커니즘을 개발했다.[64] 그는 유통 중인 화폐의 양이 많은 국가에서는 가격이 상승하여 화폐가 상대적으로 부족한 국가에 비해 경쟁력이 떨어진다고 제안했다.[65] 그러나 캉티용은 국제 시장이 균형을 이루는 경향이 있다고 믿지 않았고, 대신 정부가 가격 상승과 경쟁력 하락을 피하기 위해 주화를 비축한다고 제안했다.[64]
캉티용은 가치론에서는 프랑수아 케네에 앞서 중농주의를 주장했지만, 본래적 가치와 시장 가격의 괴리에 주목하고, 그 괴리를 이윤 기회로 추구하는 기업가의 존재를 정의했다.
3. 3. 가치론
캉티용은 『상업 시론』에서 '''토지는 모든 물산과 상품의 소재이며, 노동은 그 형식이다'''라고 말하며, 생산물의 가치는 결국 토지의 가치로 환원된다고 프랑수아 케네에 앞서 중농주의를 주장했다. 그는 '''현금의 증가는 그에 비례한 한 국가의 소비 증가를 일으키고, 그것이 점차 가격의 고등을 낳는다'''라고 승수 효과에 의한 화폐 유통량 통제의 필요성을 언급하며, 중상주의의 주장 중 하나인 무역 차액주의를 지지했다.캉티용은 가치론에서 중농주의적 입장을 취했지만, 본래적 가치와 시장 가격의 차이에 주목하여 그 차이를 이윤 기회로 추구하는 기업가의 존재를 정의했다. 그는 기업가와 고객이 시장에서 "거래"를 함으로써 시장 균형 상태가 실현된다고 결론지었다.
3. 4. 기업가 정신
전통적으로 장바티스트 세가 기업가라는 단어를 만들고 그 개념을 발전시킨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캉티용이 그의 저서 《에세이》에서 이 용어를 처음 소개했다.[1][75] 캉티용은 사회를 고정된 임금을 받는 근로자와 고정되지 않은 소득을 얻는 근로자, 두 가지 주요 계층으로 나누었다.[76] 캉티용에 따르면, 기업가는 생산 비용은 정해져 있지만, 제품에 대한 수요는 불확실하기 때문에 예측하기 어려운 소득을 얻는 비고정 소득 근로자이다.[77][78] 캉티용은 기본적인 틀을 제공했지만, 불확실성에 대한 이론을 발전시키지는 않았다. 이 주제는 20세기에 루트비히 폰 미제스, 프랭크 나이트, 존 메이너드 케인스 등이 다시 연구했다.[79] 이후의 기업가 정신 이론에서는 기업가를 파괴적인 힘으로 보는 경향이 있지만, 캉티용은 기업가가 소비자의 선호를 정확하게 예측하여 시장의 균형을 가져온다고 보았다.[80]캉티용은 가치론에서 프랑수아 케네에 앞서 중농주의를 주장했지만, 본래적 가치와 시장 가격의 차이에 주목하고, 그 차이를 이윤 기회로 추구하는 존재로서 기업가를 정의했다. 그리고 기업가와 고객이 시장에서 "거래"를 함으로써 시장 균형 상태가 실현된다고 결론지었다.
4. 중상주의와 중농주의의 관계
캉티용은 『상업 시론』에서 '''토지는 모든 물산과 상품의 소재이며, 노동은 그 형식이다'''라고 말하며, 프랑수아 케네에 앞서 중농주의를 주장했다.[4] 또한 '''현금의 증가는 그에 비례한 한 국가의 소비 증가를 일으키고, 그것이 점차 가격의 고등을 낳는다'''라고 승수 효과에 의한 화폐 유통량 통제의 필요성을 언급하며, 중상주의의 주장 중 하나인 무역 차액주의를 지지했다.[4]
캉티용은 가치론에서는 중농주의적 입장을 취했지만, 본래적 가치와 시장 가격의 괴리에 주목하고, 그 괴리를 이윤 기회로 추구하는 기업가의 존재를 정의했다.[4] 그리고 기업가와 고객이 시장에서 "거래"를 함으로써 시장 균형 상태가 실현된다고 결론지었다.[4]
5. 영향
《상업 일반에 관한 시론(약칭 《시론》)은 출판 전까지 필사본 형태로 유통되며 튀르고를 비롯한 중농주의자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91][92] 특히 프랑수아 케네는 미라보 후작을 통해 《시론》을 접하고 많은 영향을 받았지만,[93][94] 토지의 희소성, 인구 이론 등 일부 전제를 거부하며 독자적인 이론을 발전시켰다.[97] 케네는 자본의 희소성과 자본 축적을 투자의 전제 조건으로 인식했다.[95] 그럼에도 불구하고, 캉티용은 케네에게 미친 영향으로 인해 헨리 힉스에 의해 "중농주의의 아버지"로 여겨졌다.[98] 캉티용은 스코틀랜드 경제학자 제임스 덴함-스튜어트에게도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이 있다.[99]
19세기 후반, 윌리엄 스탠리 제번스는 《시론》을 "경제학의 요람"으로 재평가하며 캉티용의 업적을 재조명했다.[28] 애덤 스미스는 《국부론》에서 캉티용의 임금 생존 이론을 차용하는 등[1][100] 캉티용은 고전학파 경제학의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일부 경제 사학자들은 애덤 스미스가 독창적인 가치를 거의 제공하지 못했다고 주장하기도 하지만,[1][102][103] 캉티용이 애덤 스미스와 중농주의자들에게 미친 영향을 통해 고전 학파 사상에 크게 기여한 것은 분명하다.[104] 캉티용은 장바티스트 세에게도 영향을 주어 그의 방법론에 영향을 미쳤다.[1][105]
캉티용의 《상업 시론》은 미라보 후작과 뱅상 드 구르네의 이론 형성에도 영향을 미쳤다. 1755년에 프랑스어 번역본이 출판되었지만, 미라보 후작의 《인간의 친구》(1756년)와 케네의 《경제표》(1758년) 등 중농주의 대표 저작들에 가려져 주목받지 못하다가, 1881년 제번스에 의해 "경제학의 요람"으로 재평가받았다.
6. 저서
나고야 대학 출판회에서 1992년에 출판된 Essai sur la Nature du Commerce en Général프랑스어(상업론)은 츠다 타쿠미가 번역했다.[1]
7. 참고문헌
- Essai sur la Nature du Commerce en Général|상업론프랑스어, 商業本論|상업본론일본어, 츠다 타쿠미 역, 나고야 대학 출판회, 1992년
참조
[1]
논문
Richard Cantillon: The Father of Economics
[2]
간행물
Much of the life of Richard Cantillon, author of the ''Essai'', remains enveloped in mystery.
Spengler
1954-08
[3]
간행물
Brewer 1992, p. 2; Brewer notes two suggested dates of birth, but puts greater weight on the validity of Antoine Murphy's estimate, "Murphy thinks that Cantillon was probably born in the 1680s, at Ballyronan in County Kerry, Ireland; Walsh says that he was born in 1697 (which is hard to square with the fact that he was in a position of responsibility in 1711)". Spengler {{Nowrap|August 1954}}, p. 283; Spengler cites Hone and mentions the same uncertainty in Cantillon's date as birth, "He was born in Ireland, in {{Nowrap|March 1697}}, according to Hone, and some seven to seventeen years earlier according to others."
[4]
간행물
Higgs 1891, p. 270; Higgs cites the so-called Burke's ''Heraldic Illustrations, 1845, plate 51''.
[5]
간행물
Brewer 1992, p. 2; Higgs 1891, pp. 271–272
[6]
간행물
Brewer 1992, p. 2
[7]
간행물
"Paymaster General James Brydges was a very wealthy man with much influence, which allowed Cantillon to make political and business connections before again leaving for France in 1714."
Finegold
2010-09
[8]
간행물
Brewer 1992, p. 4; Finegold {{Nowrap|September 2010}}; Rothbard 1995, p. 345
[9]
간행물
Brewer 1992, p. 4; Finegold {{Nowrap|September 2010}}
[10]
간행물
"Moreover, Richard's mother's uncle, Sir Daniel Arthur, was a prominent banker in London and Paris ..."
Rothbard
[11]
간행물
Brewer 1992, pp. 4–5
[12]
간행물
Rothbard 1995, pp. 345–346; Brewer 1992, p. 5
[13]
웹사이트
The Key of Wealth
https://archive.org/[...]
Johnson Reprint Corp
[14]
간행물
Rothbard 1995, pp. 327–330; Finegold {{Nowrap|September 2010}}
[15]
간행물
Brewer 1992, pp. 5–6; Finegold {{Nowrap|September 2010}}
[16]
간행물
Brewer 1992, p. 6; Finegold {{Nowrap|September 2010}}; Rothbard 1995, pp. 329, 345–346
[17]
간행물
He was introduced to Law at an early stage ... Most important, he bought shares early and sold at a large profit, thinking that the scheme was unsound and was bound to fail." Brewer also notes that Cantillon was acting as John Law's personal banker, at the time.
Brewer
[18]
간행물
Cantillon's reply is according to Higgs, who records Law as follows: "His great credit during the Regency aroused the jealousy of John Law, who held blunt language with him: 'I can send you to the Bastille to-night if you don't give me your word to quit the kingdom in four and twenty hours!#REDIRECT
Higgs
[19]
간행물
Finegold {{Nowrap|September 2010}}; Rothbard 1995, p. 346
[20]
간행물
Brewer suggests that Cantillon stored his wealth in London to avoid high French taxes levied on those who had profited from the speculative bubble. Hyse writes that profits were remitted both to London and Amsterdam, "The English records indicate that Cantillon remitted his speculative profits from Paris to Amsterdam and London."
Brewer
[21]
간행물
Rothbard notes that these high interest rates incorporated an inflation premium.
Rothbard
[22]
간행물
Brewer 1992, pp. 7–8; Rothbard 1995, pp. 346–347
[23]
간행물
Brewer 1992, p. 9
[24]
간행물
In the introduction to the [[Ludwig von Mises Institute]]'s 2010 edition of ''Essai'', Mark Thornton and Chantal Saucier write, "Based on the book itself and other evidence, we are now reasonably confident that Cantillon completed the manuscript in 1730." Brewer, p. 9
Cantillon
[25]
간행물
''Essai'' was published roughly twenty-one years after Cantillon's death.
Spengler
1954-08
[26]
간행물
Hone 1994, p. 96
[27]
간행물
Cantillon 2010, p. 15
[28]
간행물
Cantillon's essay is, more emphatically than any other single work, 'the cradle of political economy.'" Editors Mark Thornton and Chantal Saucier write, "The influence of Cantillon's manuscript was largely unknown and the book had fallen so far into neglect that William Stanley Jevons was said to have "rediscovered" it in the late 19th century."
Jevons
[29]
간행물
The ''Essai'' is far more than a mere essay or even collection of disconnected essays like those of Hume. It is a systematic and connected treatise, going over in a concise manner nearly the whole field of economics, with the exception of taxation." Rothbard 1995, p. 345; Cantillon 2010, p. 13; Brewer 1992, p. 11
Jevons
[30]
간행물
Cantillon 2010, p. 5
[31]
간행물
Like Cantillon, Petty proposed that the value of an object was the aggregate of the land and labor involved in its production.
Jevons
[32]
간행물
What Petty failed to accomplish—but for what he had offered almost all the essential ideas—lies accomplished before us in Cantillon's ''Essai''.
Schumpeter
[33]
간행물
I shall argue that Cantillon took very little from Petty, and that he completely remade the little that he did take." Schumpeter concedes, "True, it was not accomplished in the style of a pupil who at every step looks back over his shoulder for the master's guidance, but in the style of an intellectual peer who strides along confidently according to his own lights."
Brewer
[34]
간행물
Brewer 1992, p. 15
[35]
간행물
Higgs 1892, p. 437
[36]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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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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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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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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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lerno 19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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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Hayek 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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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Brewer 1988; Thornton December 2007; Thornton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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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Brewer 1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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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Thornton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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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Finegold September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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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Cantillon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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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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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Rothbard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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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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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Cantillon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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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Cantillon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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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Cantillon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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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Cantillon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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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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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Rothbard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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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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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How Cantillon Effect Works In 5 Steps (Top 2024 Dangers)
https://www.swanbit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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商業試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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